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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피노키오, 우리 모두의 작은 거짓말 "자기기만"

‘나’를 이해하는 첫걸음 : 자기기만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만큼 까다로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막 출근한 아침에는 환자들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하루를 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불과 열 명 남짓한 환자를 보고 나니 벌써 지쳐 진료실을 벗어날 궁리만 하게 된다. "내가 이 직업을 좋아하기는 하나?"라는 의문에 빠지면서, 직업을 바꾸고 새 삶을 개척하는 스스로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하루 진료가 끝나고 나면, "내가 잘하고, 해야 할 일이 결국 이 일 아닌가"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내일을 기약해본다.

자기기만이란 말 그대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현실 도피이자, 자기 마음을 갉아먹고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망가뜨리는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된다. 물론 "내가 나를 속일 수 있냐"며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나'들이 모여 있으므로 이들의 관심을 한군데로 모으고, 의도한 방향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정치가의 수완, 즉 거짓말에 능해야 한다. 평범한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나'들이 대화하고 협상하는 과정에 진실만이 개입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합리화하는 나(A)와 양심적인 나(B)에게 "밤 10시가 넘었지만, 치킨을 먹어도 괜찮을 거야. 내일 헬스클럽에 가기로 했으니!"라고 말한다. A는 이게 사실이 아님을 알지만, B를 설득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결국, 치킨을 먹으려면 자기기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상 속 자기기만 : 작지만 중요한 거짓말

우리의 일상 속에는 자기기만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건강을 챙기기로 결심한 사람이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으니 운동은 내일 할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운동을 미루는 경우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시간이 충분하니까 나중에 해도 괜찮아”라며 일을 미루는 모습에서도 자기기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작은 거짓말들은 당장의 불편함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후회와 자책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고, 때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며, 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는 현실 도피와 자기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독자가 "나는 언제든 끊을 수 있어. 오늘은 스트레스가 많으니까 마시는 것뿐이야"라고 합리화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사용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일까? : 자기기만의 심리적 이유

자기기만의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한다. 이상적인 나는 매일 운동을 하고, 완벽한 업무 성과를 내며, 타인에게 존경받는 모습이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이 괴리에서 오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핑계를 대며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하는 모습으로 자기기만이 나타난다.

둘째

자기기만은 자아 존중감을 유지하려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 상황이 나쁘기 때문이야.” 혹은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어”라는 위로를 통해 자아를 보호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욕구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셋째

자기기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나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있어.”, “나에게는 문제가 없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타인의 기대에 맞추려 노력하다 보면 정작 자신의 진짜 감정은 억눌리게 된다.

자기기만의 긍정적 측면 : 나를 보호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자기기만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여겨지며 자기기만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 도피와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자기기만은 당장의 불편한 마음에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해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고, 현실과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합리화하려다 보면, 점점 더 거짓말이 늘어나고 거짓말 사이에도 모순이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직면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기만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특히 젊은 청년들을 상담할 때, "결과에 구애받지 말고, 무엇이든 해보세요"라고 말해준다. 마치 올림픽에 출전한 양궁 선수가 금메달이 아니라 눈앞의 과녁만을 보고 활시위를 당기듯,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어떤 결실이라도 맺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정된 청년 시절을 결과가 불분명한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험이 크다. “자신의 꿈을 좇아라”라는 흔한 조언도 결국에는 자기기만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우울한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라는 표현도 있다. 이 이론은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제시한 것으로, 경미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우울증 환자들보다 현실을 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는 이론이다. 쉽게 말해, 경미한 우울증 환자들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평가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문제가 현실보다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나 상황에 대해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또는 “잘 해결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우울한 현실주의를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낙관적 착각 없이, 상황의 부정적인 면도 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이론의 연장선에서, 가장 큰 자기기만은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평소에는 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만약 매일매일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의 한 현자는 천장에 칼을 매달아 놓고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상기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자기기만은 때로는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방어기제일 수 있다.

  • * 우울한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 : 심리학용어로 우울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의 역할, 능력 및 통제 소재에 대한 지각이 터 현실적인 현상

마지막으로

자기 기만은 아닐지라도 거짓말 쟁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의사의 입장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필자가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매트릭스’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네오가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의 설계자인 오라클을 만나는데, 네오는 자신이 정말 전설적인 구원자인지 묻는다. 오라클은 약간 안타까운 표정으로 “너는 아니야”라는 대답을 한다. 이 말을 들은 네오는 자신이 구원자가 아닐지라도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결국 네오는 세상을 구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해내게 된다.

나중에 누군가가 오라클에게 “당신의 예언이 틀렸잖아요?”라고 지적하자, 오라클은 “나는 진실을 말한 게 아니라, 그 순간 네오에게 필요한 말을 해준 것뿐이야”라고 답한다.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때론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매트릭스의 영화의 한 장면을 정신과 진료를 하면서 항상 떠올리곤 했다. 때로는 그들에게 진실을 덮었다고 비난받더라도, 나는 그 순간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믿어왔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작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전문의

정성훈 교수

주요 경력

  •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 ·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과학과 박사
  •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입의
  • · 서울시립 은평병원 진료부장
  • ·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부교수
  • · 대천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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