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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봄

5%의 신인류, 성인 ADHD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성인 ADHD는 굉장히 부끄러운 질환이었다. 정신적 치질 같다고나 할까……? 나 역시 진단 초기에는 내가 성인 ADHD임을 고백하는 즉시 밀려오는 수치심을 막을 수 없었다. 졸지에 2등 시민, 하자인간이 되었다는 비참함이 또렷했다. 차라리 정말로 치질인 게 간단할지 몰랐다. 적절한 수술과 사후 관리로 나아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ADHD는 전두엽의 유전적 결함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갑자기 ‘ADHD에 걸렸다’는 표현은 성립하지 못한다. 선택적이지만 누구의 선택인지 알 수 없다는 면에서 비극적이다. 사는 내내 시간 분배, 대인 관계, 금전 관리, 갖가지 중독, 충동성 제어, 업무 등에서 광범위한 문제를 겪음에도 완치라는 개념 조차 없다. 현대 의학으로는 뇌 속을 열어 이상한 부분만 정상 배열로 돌리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ADHD 약물 치료의 목적도 완치가 아니다. 흔히 ADHD 약을 안경에 비유하곤 하는데, 안경을 쓰면 잘 보이고 벗으면 즉시 흐릿해지듯이 약효가 작용한다는 뜻이다.
뇌가 성장 중인 아동 ADHD의 경우 조기 약물 치료를 받으면 완치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성인 ADHD들은 이미 교정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란 소리다. 만약 가족 중 ADHD가 있다면 더더욱 한 명을 비난하거나 숨길 일이 아니다. 특히 형제자매 중 ADHD가 있을 경우, 본인 역시 부모로부터 비슷한 유전 인자를 받았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아동 ADHD를 케어하는 부모 역시 뚜렷한 증상을 보이는 자녀 외 다른 아이도 유심히 관찰해보는 것이 좋다. 아이 성향이나 가족 내 관계성, 발달 단계에 따라 아주 조용히 스며드는 ADHD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ADHD에 덧씌워진 편견들을 하루 빨리 없애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ADHD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아직도 ‘식당에서 고함치고 뛰어다니는 정신 사납고 폭력적인 남자 아이’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ADHD라는 질환은 무척 공평하여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노소 모든 인구를 통틀어 3-5% 정도의 유병률을 보이는 흔한 질환이다. 진단이 내려지지 않았을 뿐 ADHD에 근접한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연구 결과의 몇 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ADHD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혹은 고정관념은 환우들의 진단 기회를 박탈한다. ADHD라는 낙인을 갖기 싫어 ADHD 검사 자체를 회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ADHD는 없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내와 노력으로 무마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경험 상 오래 참은 사람들은 더 깊은 훼손으로써 자신의 ADHD를 발견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지각, 누락, 다툼과 갈등, 미숙한 업무 처리, 무계획, 부주의, 충동 발현은 개인적 삶에도 지대한 비용을 발생시키고 이는 결국 다시 사회적 비용이 되기도 한다. 통계적으로 ADHD들은 특유의 삶의 방식으로 인해 교통사고, 사기, 도박 중독, 이혼, 거액의 빚, 잦은 이직 등에 노출되는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나쁜 의도가 없음에도 인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에 얼렁뚱땅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ADHD를 두고 미디어가 우매한 대중을 기가 막히게 속인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ADHD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정신의학계와 제약 회사의 복잡한 결탁이 기어이 병 하나를 만들어 냈다고. 발견되지 못한 아동 ADHD로 살다 마침내 성인 ADHD가 된 내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얘기다.
그 말은 나 역시 사실 정상인일 거란 뜻이 아니라, 나라는 ADHD의 존재가 사회에서 지워져야 할 추한 모습이란 소리로 들린다. 바보처럼 살기 싫어 ADHD 치료에 전념하는 나를 또 다시 바보 취급하다니,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ADHD 약이 비싸고, 부작용과 오남용 사례도 많으며, 이 약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집단이 있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약과 검사가 더 저렴해지는 식으로 환우들의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의 효과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나부터가 약물 치료 시작 후 인생이 180도 바뀐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약물의 교정 효과 자체는 그저 안경과 같다. 분명히 나아지긴 해도 먹는 즉시 드라마틱한 나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을 몇 년이나 꾸준히 먹어도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더 많다. 그러나 ADHD 약의 궁극적 효과는 아주 작은 변화들을 그러모아 직접 삶의 나비 효과를 설계하는 것에 있다. 성인의 삶에서는 통제력이 곧 자신감이자 사회성이 된다. ADHD는 모자라고 바보 같다기 보단 바로 이 통제력의 결여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성취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어제보다 30분 일찍 일어나기, 흥분하거나 끼어들지 않고 남들과 긴 대화하기, 스케줄러를 성공적으로 사용해 보기, 금주나 금연에 성공해보기, 일을 잘 해내는 식으로 직장 동료를 놀래키기, 독서나 공부에 온전히 집중해 보기 등 남의 것인 줄만 알았던 사소한 성취들이 가능해지는 순간부터가 치료의 시작이다. 이게 되면 이 이상도 되고, 한 단계 나아갈 때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미래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물 치료 전 내 삶에는 ‘할 수 있다’는 느낌 자체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이 원숭이처럼 ‘나대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웠고, 실제로도 그런 식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미묘한 선을 학습하고 지킬 수 있게 된 후로는 주변과의 관계도 급속도로 좋아졌다. 내가 아직도 부족하단 말 뒤에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는 유능하기도 하다는 부연 설명을 붙일 수도 있게 되었다. 처음 보는 이가 당연히 나를 미워하리라 상상하지도 않고, 만일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이유를 궁금해할 만큼의 담력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까짓 게 변화냐고 묻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까짓 것이 내 인생을 크게 바꿔 주었기에 상관없었다. 내 인생은 남들과 다르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남들과 같은 정도와 방식으로 복구되지도 않는다. 한때는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인 나를 마치 아이처럼 달래고 얼러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평생 약을 먹으며 정상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도 무력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나 저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정상’이나 ‘평범’은 아무 데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살수록 헌 것이 되는 셈이었다. 그 속에서 자꾸 빛나는 새 것이 되려는 집착이 나를 더욱 누더기로 만들었다.
이제 나는 ADHD를 가능과 불가능, 우등과 열등, 유능과 무능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굳이 라벨을 붙이자면 이것은 색깔의 개념이 아닐지. 핑크색 옷을 입었다고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듯 ADHD라는 색채에도 눈치라는 옵션이 붙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울증, 자폐, 양극성 장애, 불안장애 등 ADHD와 어느 정도 결을 같이 하는 질환들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7년이란 시간이 나를 비ADHD로 만들어 주진 않았지만, 비ADHD 상태에 대한 갈망과 소망을 없애주었다. 덕분에 앞으로의 7년은 어떨지 기대해 볼 힘을 얻었고, 나는 이제 이 조그만 힘을 다른 ADHD 환우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별 재주가 없기에 내가 이미 지나온 혼란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의 미욱한 글이 모든 사람을 구하진 못해도 어딘가에서 홀로 울고 있는 단 한 명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마주치지 않고도 서로를 만날 수 있기를, 함께 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서로가 살아가고 있단 것만으로 위안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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